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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영화 ‘노 타임 투 다이’가 개봉했습니다. 여섯 번째 제임스 본드의 대미를 장식할 작품인 만큼, 이번 작품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볼거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단연 ‘추격신’이었습니다. 제임스 본드를 잡기 위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악당들의 모습은 엄청난 긴장감과 스릴감을 동시에 선사했어요. 심지어 늪이나 강을 만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맹렬한 추격을 이어갔죠. 이는 “저거 도대체 무슨 차야?”라는 생각을 들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 장면이 모두 실제 연출로 촬영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촬영에 사용된 차량의 내구성이 워낙 튼튼해서, 별도의 차체 구조 변경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출연진의 안전을 위해 ‘롤 케이지’를 설치한 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도대체 어떤 모델이기에, 이처럼 과격한 자동차 스턴트를 순정 상태에서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제임스 본드에 버금가는 상남자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오늘의 주제는 바로, ‘랜드로버 디펜더’입니다.

지금이야 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프리미엄 SUV 지만, 사실 디펜더는 ‘농·임업용 차량’이었습니다. 예전에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했던 농업용 트럭 ‘세레스’와 여러모로 유사했죠. 한마디로, 농촌을 위해 태어난 자동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40년대 중반, 영국의 자동차 회사 ‘로버’의 창립자인 ‘윌크스 형제’는 농장에서 타고 다닐 용도로 군용 지프 한 대를 구입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과잉 생산된 탓에 일반 승용차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비포장도로를 달리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윌크스 형제는 군용 지프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오프로드 성능 하나만큼은 그 어떤 자동차보다 탁월했지만, 트랙터를 대신하는 농업용으로 사용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거든요. 이로 인해 윌크스 형제는 농사일을 돕는 데에 특화된 지프를 만들어보기로 합니다.

윌크스 형제는 먼저 자신들이 타던 군용 지프를 개조했습니다. ‘센터스티어’로 명명된 이 모델은 트랙터처럼 다양한 농기계를 연결할 수 있으며, 자동차를 기반으로 만들었기에 운전하기 편리하다는 장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수화물 운반도 가능해, 농업 종사자들에게 굉장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센터스티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 윌크스 형제는 본격적인 농·임업용 차량 개발에 뛰어듭니다. 윌크스 형제 중 한명이자 로버의 디자이너인 ‘모리스 윌크스’가 해변 모래사장 위에다가 설계도를 스케치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바로 이때 탄생했습니다

그리하여 1948년 4월, 윌크스 형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모터쇼에서 디펜더의 조상인 ‘시리즈 I’을 공개합니다. 아울러 ‘랜드로버가 가는 곳이 곧 길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로버의 오프로드 브랜드인 ‘랜드로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시리즈 I은 말 그대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농업 종사자는 물론, 미국산 지프를 수입하려던 영국군의 마음까지 사로잡았죠. 주문이 얼마나 밀려들었는지, 1주일 동안 100대가량을 생산해도 납기 일정을 맞추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고육지책’으로 내놓았던 ‘알루미늄 합금 차체’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영국은 심각한 철강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시리즈 I은 철 대신 알루미늄 합금 차체를 채택하게 됩니다. 늘 부족했던 철과 달리, 알루미늄은 전투기 조립을 위한 물량이 한가득 쌓여있었거든요. 비록 생산단가는 철을 사용할 때보다 비쌌지만, 덕분에 시리즈 I은 녹슬지 않는 강인한 차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리즈 I의 성공 이후, 랜드로버는 명실상부한 오프로드 전문 브랜드로 명성을 확립하게 됩니다. 더불어 후속 모델인 ‘시리즈 II’와 ‘시리즈 III’까지 대히트를 시키며, 단일 차종으로 28년 만에 ‘밀리언셀러 모델’이 되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사실상 영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1983년, 랜드로버는 시리즈 III의 후속 모델인 ‘90’과 ‘110’을 출시합니다. 사실상 이름만 다를 뿐, 시리즈 III와의 차이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죠. 변경된 부분은 보닛의 길이와 그릴의 디자인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뜨거웠습니다. 독보적인 오프로드 주파력과 강인한 내구성 그리고 뛰어난 실용성까지, 그 어떤 모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1989년, 90과 110은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디펜더’로 이름을 바꿉니다. 겉모습은 큰 차이가 없었으나, 성능 면에서는 파격적인 변화를 거쳤죠. 특히 1998년에는 TD5 엔진과 전자 주행 보조장치를 탑재해, 오프로드 주행 성능이 더욱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큰 변화 없이 설계를 유지해온 탓에, 디펜더는 여러 규제에 발목을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그 흔한 에어백조차 존재하지 않아, 미국처럼 안전을 중요시하는 시장에서는 판매되지 못했죠. 1세대 디펜더가 한국에 정식 출시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엔진이었습니다. 엔진 배기량을 줄이고 디젤 미립자 필터(DPF)도 장착했지만, 매년 강화되는 환경 규제를 통과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2015년 12월, 1세대 디펜더는 67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잠깐 동안의 휴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디펜더를 향한 소비자들의 욕망은 여전했습니다. 단종 직전 모델의 중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하고, 심지어 단종된 디펜더를 재생산하겠다는 기업까지 등장했습니다.

2016년, 영국의 화학 회사 ‘이네오스’의 회장 ‘짐 라치클리프’는 랜드로버에게 1세대 디펜더 재생산을 요청합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1세대 디펜더를 새 차로 바꾸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당시 랜드로버는 2세대 디펜더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라치클리프 회장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라치클리프 회장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하여 1세대 디펜더를 직접 재생산하기로 결심합니다. 영국 최고의 부자이기에 가능한 발상이었죠. 그리하여 라치클리프 회장은 1세대 디펜더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연한 차량을 기어코 완성해냅니다.

라치클리프 회장의 단골 술집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네오스 그레너디어’는 1세대 디펜더와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합니다. 익스테리어는 물론, 투박한 인테리어까지 똑같이 구현했어요. 이에 1세대 디펜더 마니아들은 “랜드로버의 2세대 디펜더보다 완벽하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능 역시 탁월합니다. 잠깐 동안 랜드로버를 소유했었던 BMW의 파워트레인을 그대로 가져왔거든요. 그 유명한 BMW의 직렬 6기통 엔진과 ZF 8단 자동변속기가 고스란히 적용되어, 디젤 모델 기준 394 마력의 최고출력과 77.5kgf·m의 최대토크를 뿜어냅니다. 게다가 조만간 현대자동차의 수소연료전지를 적용한 모델도 출시한다고 하니, 여러모로 기대가 큽니다.

2019년 9월, 랜드로버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2세대 디펜더를 공개합니다. 3년간 잠들어있었던 ‘디펜더’라는 이름을 드디어 부활시킨 것입니다.

2세대 디펜더는 1세대 특유의 투박하고도 강인한 실루엣을 멋지게 재해석했습니다. ‘알파인 라이트 윈도우’나 ‘사이드 오픈 테일 게이트’와 같은 1세대만의 특징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도심형 SUV의 감성을 살짝 가미했어요. 덕분에 차가운 도심의 빌딩 숲과도 잘 어우러집니다.

가장 큰 변화를 이룬 곳은 단연 ‘인테리어’입니다. 에어백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1세대 디펜더와 달리, 2세대 디펜더는 프리미엄 SUV 다운 편의 사양을 풍성하게 갖추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안드로이드 오토’나 ‘애플 카플레이’도 당연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세대 디펜더만의 감성을 완전히 지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2세대 디펜더는 세계 최초로 차체 구조의 일부인 ‘크로스카 빔’을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활용해, 초창기 랜드로버가 보여주었던 날 것 그대로의 거친 느낌을 세련되게 표현했습니다. 마치 마동석이 정장을 갖춰 입은 느낌이에요.

랜드로버답게, 오프로드 성능도 탁월합니다. 디펜더 90 모델 기준, 진입각은 31.5° 이탈각은 35.5°에 달합니다. 스키장 최상급 슬로프의 각도가 30°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못 가는 도로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에 2022년형 모델부터는 경량 알루미늄으로 설계한 3,000cc 직렬 6기통 ‘D250’ 엔진을 탑재해, 기존 2,000cc 4기통 엔진의 단점으로 지목되던 ‘출력의 부족함’을 시원하게 해소했는데요. 249마력의 최고출력과 58.1kgf·m의 최대토크는 역동적인 오프로드를 즐기기에 차고 넘칩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승차감’입니다. 도심형 SUV의 감성이 더해지면서, 2세대 디펜더는 1세대 모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안락함을 갖추었습니다. 덕분에 패밀리 SUV로 활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에요. 경쟁 모델로 언급되는 ‘벤츠 G 바겐’이나 ‘지프 랭글러’의 승차감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디펜더는 여전히 1세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능 면에서는 2세대 디펜더가 훨씬 우수한 모델인데, 아직도 매체와 소비자들은 1세대 디펜더의 ‘감성’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라치클리프 회장의 ‘이네오스 그레너디어’가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디펜더’라는 이름에 담긴 명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1세대 디펜더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2세대 디펜더는 존재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2세대로 이어진 디펜더의 명성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이번 콘텐츠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진짜 상남자!” 신형보다 구형이 대접받는 1억 원대 정통 SUV
글 / 다키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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