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형 세단 에스페로를 기억하는가? 당시 톰 크루즈 주연 ‘탑건’ 연출팀이 직접 광고 제작에 참여해 화제가 됐다. 이 때문인지 언론에서도 관심 있게 다뤘던 모델이었고, ‘다시 출시되면 구매하고 싶은 자동차’ 리스트에 오를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차다.

에스페로는 대우에서 4년 1개월 동안 1,400억 원을 쏟아부어 만든 독자 모델이다. ‘에스페로’란 단어는 스페인어로 ‘희망하다, 기대하다’를 의미한다.

에스페로의 디자인을 보면 지금 봐도 특이한 자동차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릴이 없는 일체형 방식을 채택했고, 앞 범퍼 아래쪽에 커다란 에어댐을 추가했다. 여기에 시야를 넓힐 목적으로 6윈도를 채택해 남다름을 과시했다.

시트로앵 XM 묘하게 닮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디자인 한 것으로 보기 힘든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 업체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와 공동 디자인을 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에스페로가 1989년 출시한 준대형 해치백 ‘시트로앵XM’과 매우 흡사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사실 시트로앵 모델도 베르토네에서 디자인했다.

성능 측면에서는 나름 주목할 만한 사항들이 몇 가지 존재한다. 우선 세계 수준의 낮은 공기저항 계수다. 디자인을 보면 알겠지만, 유선형의 날렵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통해 0.29Cd 수치를 기록했다. 당시 수입차 BMW 850i가 같은 공기저항 계수를 가지고 있었고, LF쏘나타 공기저항 계수가 0.27Cd 임을 감안한다면 90년대에 이를 이뤄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수치다.

하지만 에스페로 출시 후 공기저항 계수에 대해 선전하려고 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홍보 용도로 사용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엔진은 르망 임팩트에 사용했던 2.0L CFI 가솔린 모델을 얹어 100마력에 16.2kg.m 토크 성능을 갖췄다. 여기에 연비의 경우 수동 13.52km/L, 자동 12.23km/L로 당시 동급 차종 중 높은 편에 속했다. 이는 낮은 공기저항 계수도 한몫했다.

안전성을 살펴보면 나름 노력한 흔적이 많다. 대우차는 안전성 강화를 위해 차체 조각수를 최소화하고 차량 문이 추돌사고 시 옆으로 빗나가도록 하는 등 두 차례에 걸친 충격 흡수 설계와 컴퓨터를 이용한 예방안전설계를 적용했다. 이를 통해 미연방안전도기준(FMVSS)를 통과해 주목받기도 했다.

또한 호주, 미국, 캐나다, 국내 등지에서 각종 시험을 거쳐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를 했다.

덕분에 출시 후 90년대 초 자동차 내수 판매가 크게 늘어 자동차 산업 전반에 훈풍을 불어넣었다.

국내에서의 인기는 해외로 이어졌다. 1991년도부터는 북미시장과 더불어 중동 및 동남아 시장까지 수출을 확대하면서 전성기를 이어갔다. 에스페로는 총 생산 대수의 절반이 해외로 수출됐는데, 해외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같은 가격, 동급 차량들에 비해 편의 기능이 많아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또한 자동차 판매 실적 호조에 경제 호황이 이어지다 보니 여름 휴가철 자동차 수요가 폭증해 2,400여 대가 밀려 약 한 달 동안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1991년, 영국 로터스의 자문을 받아 개발한 1.5L DOHC 엔진을 추가한 이후 1.5L/1.8L MPFI 엔진 등을 추가하면서 다변화를 꾀했다. 에스페로의 엔진은 일명 ‘한국형 엔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신호등이 많고 도심지 저속 주행이 많은 우리나라 특성에 맞게 저속 RPM에서 최대 출력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 자동차들과 비교한다면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그 시절 출시된 차량들과 비교했을 땐 준수한 성능이었다고.

일부 운전자들은 “차량 정숙성은 좀 떨어졌지만 특유의 중저음 배기음이 좋았다.”라는 의견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매일같이 꽃길만 걸어갈 것으로 예상됐던 것과는 달리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바로 품질 문제다. 멋있는 디자인에 우수한 저속 구간 출력은 높은 점수를 줄만 했지만, 부품의 정밀도가 떨어져 엔진 오일이 새 거나 노킹 현상을 보이는 차가 많았고, 급가속 시 소음과 진동이 심했다.

이런 문제가 발생 한 후 품질 개선을 통해 일단락 지었으나, 이미 안 좋은 품질로 입소문을 타는 바람에 단종까지 발목을 잡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 넓은 후방 시야를 위해 채택한 6윈도는 시야 측면에서는 좋았지만 유리 사이사이에 들어간 분할 프레임이 차량 디자인의 옥에 티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품질평가단 100명을 모집해 1년 동안 에스페로를 빌려주고 시승하도록 한 행사를 진행했는데, 평가단의 95% 이상이 이 모델을 구매해 예상외의 결과를 보였고, 이는 유럽 수출길 개척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앞서 언급한 성과를 통해 영국 시장에 첫 발을 내디딘 대우차는 전용매장이 아닌 마트 앞에서 차를 세워놓고 판매하는 기발한 마케팅 방법을 시도해 나름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또한 에스페로의 디자인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했던 무난한 디자인과 거리가 있어 호불호가 강했다.

종합해보면 디자인 자체는 좋았지만 호불호가 강했고, 차량 완성도가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짧은 자동차 역사로 인한 기술력의 부재로 볼 수도 있다.

누비라

위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1997년 누비라가 출시됐고, 에스페로는 바통을 던져준 뒤 1998년까지 수출용으로만 생산되다 단종됐다. 1990년 출시 이후 1998년까지 에스페로는 총 54만 6천여 대가 팔렸으며 그중 23만 7천여 대가 수출용이었다.

여러모로 특이한 점이 많았던 에스페로, 어찌 보면 대우차의 혼을 있는 대로 불어넣은 자동차였다. 광고를 시작으로 해외 마케팅, 차량 개발 등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시 출시되면 타고 싶은 차중 하나로 에스페로가 선정될 만큼 그때 그 시절 모든 이들의 마음속 슈퍼카는 에스페로가 아니었을까?

한 네티즌이 상상한 리뉴얼 에스페로 / 보배드림
한 네티즌이 상상한 리뉴얼 에스페로 / 보배드림

예전에는 무난한 디자인이 대세였지만, 지금은 나를 어필하는 개성시대다.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양념을 잘 쳐서 에스페로 리뉴얼 버전을 출시한다면 꽤나 인기가 많았을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27년 전 자동차 업계는 새로운 시도가 넘쳐 났던 시절로 기억된다. 당시 느꼈던 신선한 충격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그런 자동차가 출시되었으면 한다.

“해외 브랜드와 동급 성능”과 같은 수식어가 아닌 “우리 회사에서만 볼 수 있는”과 같은 단어로.

시대를 앞서간 디자인, 대우 에스페로

글 / 다키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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