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내용은 한 독자님의 이야기입니다.
독자님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연재 중이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993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한국전쟁, 군사정권, 민주화를 모두 지켜보시다 84세 천수를 누리시고 평안히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돌아가시기 전날 목욕물을 좀 받아달라 하시고, 돌아가실 때 입으려 준비하신 한복으로 갈아입으시고는 기도하시다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 할머니 기일에 온 가족이 모였다. 각자 할머니와 관련된 추억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셨다.
“어머니가 편찮아지시면서 늘 차에 모셔서 병원에 갔었어. 직장에서 너무 힘든 일들이 반복되던 시기였는데 차에 올라타시는데 너무 오래 걸리는 거지. 나는 ‘엄마, 빨리 좀 해요.’라고 짜증을 냈고,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셨어. 그때 엄마한테 부린 짜증이 너무 후회가 돼. 왜 그 순간을 못 참았을까…”
라 하며 아버지가 우셨다. 그때 나는 발견했다. 늘 당당하고 강한 아버지 또한 속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 이야기는 그때 우리 가족의 첫 차였던 ‘르망’ 이야기다.
아버지는 첫 차로 르망을 뽑으셨다. 사진 속에서 차 앞에서 사진 찍은 나의 나이를 추론하면 아마 1988~1990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른바 ‘마이카’ 시대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차가 마음에 드셨는지 늘 놀러 가거나 하면 누나와 나를 차 앞에 세우고 사진을 찍어 주시고는 했다.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을 보면 늘 뒤에는 아버지의 르망이 당당하게 세워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뜨악할 일이지만 아버지는 엔진룸까지 물청소를 꼬박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건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릴 적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것은 저녁 시간 즈음에 아버지가 잠깐 나가시면서 하셨던 그 대사다.
“나 잠깐 차에 좀 다녀올게.”
차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릴 적 나는 아버지가 정말 차를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르망은 이후에 기아 세피아로 바꾸기 전까지 우리 가족을 부지런히 데리고 다녔다.
고향이 대구였던 나는 그 차를 타고 경주 도투락 월드(현 경주월드)를 가기도 했고 팔공산 드라이브도 가고 포항 감포 바닷가에도 갔다. 그리고 편찮으신 할머니를 모시고 단골로 가시던 병원에도 다녔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나는 어렵사리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들을 낳고 당시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말을 조금씩 시작하는 두 돌 지난 아들은 주말에 “아빠 차 슝!”이라고 하면서 내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자고 항상 보챈다.
카시트에 잘 타는 아들 덕에 와이프에겐 가끔 휴식의 시간을 주고 부자가 둘이서 여기저기 다니기 시작했다. 달라진 것은 아버지의 르망에서 나의 말리부로 바뀐 것이고 대구 팔공산에서 서울 북악 스카이웨이로 바뀐 것뿐이다. (어쨌든 부자는 나란히 대우 차를 타고 있긴 한 셈이다.)
회사 7년 차에 접어들어 회사 안에서도 해야 할 일과 책임들이 조금씩 생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상사의 질책과 기대도 함께 커진 것 같다. 맡아서 해야 할 프로젝트는 규모도 난이도도 높아지는데 나는 아직 그럴 만한 역량이 안 되는 것 같아 괴로울 때가 너무 많다.
거듭되는 잔 실수에 상사에게 혼나는 건 예사고, 실적은 나오지 않고 매일 지친 발걸음으로 돌아와 잠든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주말에는 아이와 놀아주고 정신 차리고 보면 다음 주 월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퇴근을 조금 일찍 한 날 아이를 씻기고 재운 후에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 잠깐 차에 좀 다녀올게.”
회사도 가족도 아닌 오롯한 나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차에 앉아 노래도 틀지 않고 고요한 적막 속에 가만히 나를 맡겼다. 내 차와 나 단둘만 있다. 이 적막함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30년 전 아버지께서 한 번씩 차에 다녀온다는 그 말의 정체를.
누구보다 당당하고 내게는 큰 산 같은 아버지도 알고 보면 지금 나처럼 여전히 부족한 자신을 탓하고 회사에서도 가족에게서도 도망치고 싶은 순간 그를 위한 그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거다.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당시 르망 안에 혼자 앉아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렇게 이야기해드리고 싶다.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당신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수고 많이 하고 있다고.
어쩌면 이 말은 지금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나 잠깐 차에 좀 다녀올게.” 아버지와 르망
편집 / 다키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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